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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응현(宋應賢)

(목)장사랑공파

소개

양오당(養吾堂) 송응현(宋應賢) 묘역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내사리 산273

양오당(養吾堂) 송응현(宋應賢)은 장사랑공(將仕郞公) 호년(胡年)의 현손이자, 무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인수(仁壽)의 자제로 태어났으니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수(義壽)는 그의 숙부가 되신다.

자(字)가 사희(士希)인 그는 태어난 해가 전하지 않지만, 가문에 전하기를 어려서부터 천성이 남에게 굽히지 않는 기개가 있어 남보다 뛰어났으며, 옛 사람 중에 절의를 세워 의리에 죽은 일과 행실을 들으면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독서를 좋아하여 성현(聖賢)을 스스로 기약하고 일찍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름(應賢)과 자(士希)를 지어 주신 뜻을 어찌 감히 잊겠는가?” 라고 하였다.

일찍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그는 전국시대의 병법가인 손빈(孫殯)·오기(吳起)의 무술을 일찍이 익혔으며 장성하자 붓을 버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長)에 선발되었다.

그 후 그는 무기의 빈약함을 시정하려다 권세 있고 간사한 무리들의 뜻에 거슬려 결국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정착하였다.

처음에 부산 동래(東萊)에 일시 거처하다가 밀양(密陽)에 자리를 정하고 서당을 열어 양오당(養吾堂)이라 이름을 붙이고 학문을 강론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를 마구 침범하니 그는 “내가 비록 일찍이 한 고을도 맡아 다스리지 못했으나, 평생 강론한 바는 충성과 의리일 따름이다. 어찌 가히 군부(君父)의 피난을 앉아서 보고 적병을 물리침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아들 양곡(陽谷) 걸(傑)과 함께 의병(義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부자는 눈물을 뿌리며 곽재우(郭再祐) 군사와 합세하려 하였다.

양오당(養吾堂) 송응현(宋應賢) 충적비(忠蹟碑)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계전리

곽재우(郭再祐) 군사와 합세하러 가던 도중 적병을 만나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그러나 왜병은 그의 부자가 이끄는 군사보다 숫자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마침내 부자는 장렬히 순절하고 말았다. 양오당은 곽재우의 진지에 다다르기 전에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들으니 형께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시는데 응현(應賢)이 비록 무사(武士)는 아니지만, 용기는 산같이 솟구치니 응당 얼마간의 의병을 거느리고 형을 따르겠는 바, 오직 일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고 또한 방략을 갖추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갈무후(諸葛武侯)도 몸을 바쳐 다하다가 죽을 따름이라 하였으니 성패이둔(成敗利鈍)은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 드림은 곧 마땅히 힘 쓸 바이거든 다시 마음이 움직이겠습니까?”

이처럼 난리에 목숨을 택한 것은 가히 빼앗지 못할 의리로써 이미 가슴 속에 깊이 정함이었다. 그의 부자가 적을 만나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니 그의 부인 김씨가 그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내 어찌 차마 적에게 굴복하리오?” 하며 그 또한 자결하였다.

왜적이 물러간 뒤 그의 자부 김씨는 세살 난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치르니, 그 묘지는 경북 청도군 각남면 내사(慶北 淸道郡 角南面 內沙) 뒷산 누남정(樓南亭) 묘좌원(卯坐原)에 상하(上下)를 두고 장례 지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충효(忠孝)에 순절하고 부인은 열(烈)에 목숨을 바쳤으니, 세상에서는 양오당 집안을‘충효열’의 가문이라 일컬어 왔다. 이러한 큰 절의가 마침내 조정에까지 올라가 묘당(廟堂)에 기록되어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참록되고 특별히 임금의 증직(贈職) 교지(敎旨)가 내렸다.

뒤에 이 부자를 원계서원(遠溪書院)과 충덕사(忠德祠)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