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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철(宋希哲)

충순위공파

소개

경모재(敬慕齋) 송희철(宋希哲) 묘역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부암동 미계(彌溪)

경모재(敬慕齋) 송희철(宋希哲) 재실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부암동 미계(彌溪)

송희철(宋希哲)은 자가 덕보(德保)이고, 경모재(敬慕齋)는 호이다. 충순위공(忠順衛公)의 다섯 자제 분 막내인 참의공(參議公) 기(琦)의 둘째자제로 1565년(명종 20)에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학문에 힘써 장래가 기대되었다.

그가 28세 되던 때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왜구들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고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음을 보고는 서책(書冊)을 덮고 의연히 일어났다.

이에 형 희순(希醇)과 아우인 희달(希達)과 더불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의령(宜寧) 진영(鎭營)으로 찾아갔다. 그곳 역의 관사인 전사(傳舍)에서 초유사(招諭使)10)를 만났다. 이후 유격대로서 왜구를 무찌르는 데 앞장 서 용맹을 떨쳤다.

1595년(선조 28) 부친 참의공의 병환이 나서 세 자제를 불러 이르기를“나는 이제 죽으려 한다. 왕릉이 수치를 당하고 파천(播遷)의 행차(行次)가 욕을 당하니 너희들은 오직 왕의 원수를 씻지 못하거든 이 아비의 장례는 간소하게 지내는 것이 의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라.”고 유언(遺言)을 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경모재는 순절하여 아버지의 유명을 떨어뜨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경모재(敬慕齋) 송희철(宋希哲)의 충효순절비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부암동 미계(彌溪)

정유년에 왜적이 더욱 미친 듯이 날 뛰자, 아우와 더불어 고을 군사를 일으켜 이끌고 창연히 화왕산성(火旺山城)에 가서 곽재우와 더불어 싸우다가 1597년(선조 30) 3월 4일에 장렬히 순절하였다.

묘소는 합천 미계(陜川 彌溪) 유좌(酉坐)에 배위 서흥김씨(瑞興金氏) 참봉 응복(應福)의 따님과 합폄이다. 행장은 경암(敬菴) 문동도(文東道)가 짓고 묘갈은 곽종석(郭鍾錫)이 지었으며 종예(宗裔)호문(鎬文)이 썼다.

묘지는 장복추(張福樞)가 짓고 유사(遺事)는 정재규(鄭載圭)가 지었다. 슬하에는 자제 여원(慮遠)이 있다.

충순위공파의 참의공 기(琦)와 참봉공 희순(希醇), 주부공 희달(希達), 계공랑공 희신(希信)은 임진왜란시 창의를 하신 분들이다. 참의공 기(琦)는 충순위공의 5자로 관은 전생서주부증형조참의다. 아들과 함께 임란시 창의를 하였으며, 배위는 동래정씨와 광산김씨이며, 묘소는 금굴 정좌원 동광과 하측이다. 아들은 희순(希醇), 희철(希哲), 희달(希達), 희신(希信)이다. 참봉공 희순(希醇)은 참의공 기(琦)의 장자로 호는 매당(梅堂)이며 관은 주부이다. 배위는 서흥김씨 한헌당 선생 후예이며, 묘소는 역평리산 유좌원이다. 아들의 손자가 질계 절충장군과 부호군이다. 후손은 하금리와 함안군 법수면 화사리에 퍼져 있으며, 남해군 이동면 남음리에서 세거하였다.

주부공 희달(希達)은 참의공 기(琦)의 3자로 호는 매천당(梅川堂)이며, 관은 주부이다. 임란시 곽망우당과 창의하였다. 배위는 성주배씨이며, 묘소는 선고조하 동원 이광이다. 아들은 질계절충이고, 손자 증손도 벼슬이 있다. 후손들은 하금리에 세거하고 있다. 계공랑공 희신(希信)은 참의공 기(琦)의 4자로 관은 계공랑이며, 아버지, 형과 임란시 창의하였다. 배위는 남평문씨이며, 묘소는 금굴 선고조 좌측 미좌원이다. 아들은 계통덕랑이다. 후손들은 유전리에 세거하고 있다.

주석

  • 10)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났을 때 백성을 불러서 의견을 나누던 임시 벼슬.